소수자의 조립 취향과 정밀하게 침투하는 건축적 조각
김정현(미술비평가)
진정한 소수자의 탈영토화로 살아가기
한 번도 되어 본 적 없는 존재가 되는 길, 그 길을 모색하는 자들이 사는 세계, 바로 오늘날이다. 지구의 곳곳에는 유목적으로 떠도는 자들이 진정한 소수자란 무엇인가의 화두를 걸고 모험적인 탈영토화를 꿈꾼다. 때론 그것이 꿈이지만, 때론 그것이 현실이 되기도 한다. 진정한 소수자의 탈영토화를 현실화시키는 자들 속에 최민규 작가가 산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먼 미래에 지구인의 우주여행이 자유로워진 약속된 날을 상상해보자. 그 때의 여행자들은 국적과 문화와 성차와 경제력과 각종 이권으로부터 전혀 제약 받지 않는 우주여행을 떠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날의 지구인들은 더 이상 다른 행성의 소수자가 아니다. 제약이 없는 자는 소수자의 여건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수자가 없는 세상! 인류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오래된 미래지만, 한 번도 되어 본 적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 소수자가 없는 세상보다 진정한 소수자가 되는 길을 모색하는 자들이 훨씬 인간적이다. 최민규 작가는 쿠웨이트에서 산 이력이 있다. 전통적으로 불교와 친숙했고, 근대 이후 기독교와 부쩍 가까워진 한국인에게 이슬람교는 낯선 문화다. 그 곳에는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가 즐비하고, 모스크에 담긴 건축양식과 문양이 그 세계의 시각적 질서를 압도한다. 한국의 전통 사찰이나 한국식 기독교 예배당에 습관적으로 눈을 적신 한국인의 시각에 모스크의 이질적인 미감(美感)은 시각적일 뿐더러 심리적으로도 상충된 충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작가의 예술적 감흥은 훨씬 더 소수자에 다가간다.
정밀하게 침투하는 건축적 조각의 탄생과정
정밀하지만 기이한 최민규 작가의 조각 작품은 그의 중동 생활이 빚어낸 경험치의 산물이다. 모스크의 건축 문양과 한옥의 기와와 문양을 조합한 그의 건축적 조각은 정확하게 마름 되어 균형 잡힌 전체상을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절충 양식은 일차적인 설계로부터 최종 조립의 완성단계까지 일련의 정확한 공간 분할 능력을 골조로 이루어진다. 이번 《Permeate-ing》 전시는 작가가 그 동안 지속해온 정밀한 작업 과정의 연장선상에서 보다 강화된 생산적인 건축적 조각의 향방을 제시하고 있다. 전시 제목처럼, 이 전시는 ‘침투하는’현재 진형형의 상태를 강조한다. 대표작인 <Permeate Structure Ⅰ>(2015)의 제작 과정을 통해, 작가의 세밀한 작업 과정을 추적하는 미로 게임을 즐겨보자.
우선, 작가는 형태와 컨셉에 대한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제작할 건축적 조각을 스케치한 후, 전체적인 작품의 크기(1000X500X250mm)를 결정한다. 총 24면으로 구성된 건축적 조각의 각 면에는 모스크의 기둥과 벽면, 그리고 한옥의 지붕과 단청 이미지를 직접 찍거나 인터넷상에서 선별하여 포토샵 이미지로 재구성한다. 여기서 작가는 포토샵 이미지가 실제 제작되는 작품 크기보다 2-3mm 크다는 점을 치밀하게 계산해 둔다. 이후 3D 프로그램 작업을 거쳐 모형을 제작해 보고, 실제 작품을 제작할 경우의 구조적인 결함을 확인한다. 이때 발생 가능한 오류는 가장 기초적인 철판 뼈대를 조립할 때의 불균형이거나, 혹은 볼트의 길이와 너트의 두께로 인한 뒤틀림 현상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다시 보안한 후, 도면을 수치화하는 CAD 작업을 통해 정확한 크기, 그리고 볼트와 너트의 수량 및 조립 위치를 최종 결정한다. 향후 수정 불가능한 최후의 치밀한 CAD 계획단계를 거친 작업 도안은 레이져 커팅 및 CNC 제단 업체로 보내진다.
이렇게 해서 15개의 철판과 이미지가 전사된 24개의 폴리카포네이트판을 확보하고, 검정색으로 분제 도장된 철판, 우드스테인으로 채색된 나무틀, 바닥용 흑경 등을 준비한다. 드디어 조립 단계다. 작가는 철판으로 프레임을 만들고, 바닥에 흑경을 깔고, 폴리카포네이트 벽면을 붙이고 지붕을 얹는 순차적인 조립 과정을 거친다. 이 균형 잡힌 조립식 건축 조각은 육각렌치, 니퍼, 롱노우즈 등의 건축설비용 도구들이 작가의 손에서 능숙하게 돌아다닌 결과물이다. <Permeate Structure Ⅰ>의 작업과정은 이렇듯 치밀한 계산에 의한 수고스런 공정이 곁들어진 절충물이다.
사라진 블록이 전이된 조립의 취향
조립의 취향은 최민규 작가의 건축적 조각의 미적 터전이다. 어릴 적 한 번쯤 해보았을 레고 블럭 쌓기의 경험이 작가에게는 강력하게 주체화된 예술적 자양분이 되었다. 프로이트는 어린아이가 무심결에 가지고 놀던 실타래 게임을 통해, 일명 포트-다(있다-없다) 게임을 통해, 아이는 동일시되던 어머니와의 분리 관계를 서서히 배워나간다고 말한 바 있다. 실타래가 굴러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처음에는 두렵지만, 실타래를 잡아당기면 다시 눈앞에 나타나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 버린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과의 영원한 합일과 그것의 어긋남을 통해 세계를 배우고, 자아를 성장시켜 나간다. 최민규 작가는 유아기에 레고 블록 쌓기를 무척이나 즐겼다고 한다. 뒤죽박죽 흩어진 블록들을 정확하게 일일이 끼워 맞추는 조립 과정이 그 당시 어린 꼬마에게는 지상최대의 낙이자 과제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레고 블록이 사라졌고, 다시는 그 놀이에 빠져들 수 없었다.
시간은 흐르고, 꼬마는 조각가가 되어 조립을 하고 있다. 바로 어릴 적 사라진 지상낙원의 놀이를 다시 재생시키기 위해서일까. 작가는 머릿속으로 설계하고 직접 조립하는 까다로운 공정 절차를 그 자체로 즐길 줄 안다. 사라졌던 레고 블록의 트라우마는 현재 예술세계의 깊숙한 취향으로 전이되었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저마다 변이된 자양분을 매개로 생산적인 조각 작품을 만든다. 또한 자신의 길들여진 습관을 걸러내고, 또 다른 습관을 파생시키는 끊임없는 자기 극복과 재생산의 거듭나기를 구축한다. 최민규 작가 또한 여기에 동참한다. 그는 자신의 가장 깊숙이 내재한 조립의 취향을 탐색했고, 그것을 지금의 자기-규정적 실천행위로 변형시켰기 때문이다. 작업과정의 즐거움은 이렇게 작가의 내적 취향과 동맹한다.
소수자를 향한 조각적 배려
<Permeate Structure Ⅰ>이나 <Permeate Structure Ⅱ>의 전체적인 형태감은 기존의 건축물에 대한 잔영이 포함되어 있다.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건축물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본 듯한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모스크의 건축 양식과 한옥의 전통문양이 겹으로 나란히 세워진 벽면은 얼핏 보려는 관찰자의 시선을 저버리는 순간, 신세계를 드러낸다. 빛의 반사에 따른 관찰자의 시선을 이리저리 이동하며 꼼꼼히 들여다보는 순간, 하나의 이미지로 수렴되지 않는 혼재된 잔상이 우리의 시각 체계를 교란시키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은 실제 건축물의 크기가 아닌 100cm 정도의 조각품이지만, 실제 흑경으로 깔린 그 내부를 들여다본다면, 관찰자는 공간의 외부자에서 내부자의 위치로 공간 감각 능력의 전치를 유도할 수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마치 신비한 거대 사원에 기거하는 기운을 감지하게 된다.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
작가가 중동 지역에서 겪은 이방인으로서의 소수자 경험은 외지고 외로운 것이자, 날 것 그대로의 낯선 것이다. 다수가 오래된 관습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면 소수는 다수의 변두리에서 다수의 권력을 인내하고 한편으로는 넘어서려는 것이다. 그래서 소수자는 억압과 파괴의 본능을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다. 최민규 작가는 이러한 소수자의 있음에서 진정한 소수자 되기로 이행하는 중이다. 그 방식이 다름 아닌 모스크와 한옥의 건축 문양을 절충해 구성한 조립식 건축적 조각이다. 그는 실제 건축물의 설계만큼이나 구조적 결함이 없는 완벽한 건축적 조각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과정은 궁극적으로 진정한 소수자를 위한 절제된 배려와 관련된 것이다. 진정한 소수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에서 이 지구에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던 예술적 감각을 행위하기위해, 작가는 진정한 소수자 되기를 절제된 양식으로 형상화하기 때문이다. 절제된 방식으로 군더더기 없는 소수자 되기의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기위해서 말이다. 작가의 건축적 조각의 외부에서 이질적 문화가 교차되는 혼성의 장을 마주하고, 그 내부에서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신-소수자의 기운을 감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소수자를 향한 그의 건축 조각의 몫이다.